AI Digest: 救濟와 抱擁
"當身이 創造한 世界는 當身만이 救濟할 수 있다."
自身에게 형편이 좋은 다른 世界(平行宇宙)를 空想하며 그곳으로 옮겨가기를 바라는 것은 눈앞의 現実로부터 눈을 돌리는 '責任 回避'에 弗過합니다. 멀리 있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悲慘한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거나 들을 때, 그것 自體를 設定하고 그 情報를 受容하고 있는 것은 바로 當身 自身의 無意識 領域입니다. 外部 世界에 '좋다·나쁘다', '바람직하다·바람직하지 않다'며 判斷(判定)을 내리고, 自身에게 편한 곳으로 도망쳐 다니는 自我(에고)의 루프를 끝내기 危害, 우리가 행해야 할 唯一한 實踐은 只今 經驗하고 있는 自身과 世界를 통째로 自己 안으로 삼켜 안아주는(受容하는) 것입니다. 스크린 위의 救濟자는 오직 當身뿐입니다.
1:1 Verbatim Transcript (녹취록)
오리지널 講義 映像 "ZeroNews '나'와 '世界'는 當身 혼자만의 꿈演劇, 平行宇宙설의 陷穽에서 0으로"의 忠實한 노컷 녹취록 텍스트입니다. 가독성을 危害 중간 제목을 追加하여 整理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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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行宇宙라는 槪念과 그 源泉
그러면 虛空의 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虛空의 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虛空의 문으로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입니다.
安寧하십니까. 이번에는 選擇에 의한 世界 혹은 次元의 可能性, 그리고 平行宇宙에 대해서도 조금 言及하며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于先 平行宇宙라는 이 空想의 槪念에 대해 一般的으로 어떤 意味, 世界觀으로 쓰이고 있는지 簡單히 짚어報告자 합니다만, 只今 經驗하고 있는 이 世界, 宇宙 以外에 다른 世界 혹은 宇宙가 同時에 平行하게 存在한다는 可能性 혹은 가설, 혹은 設定입니다. 또한 이처럼 믿는 것, 一種의 信仰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는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만화, SF나 판타지 같은 作品들의 世界觀 基礎가 되거나, 혹은 그 作品의 一部로 차용되거나 組合되어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科學 分野, 특히 論理的 物理學이나 量子力學 같은 곳에서 世界나 宇宙를 解釈할 때, 가설이나 이 平行宇宙에 관한 論議가 있기도 합니다. 나아가 스피리추얼이나 精神世界 같은 장르에서 여러 作家나 多樣한 타이틀을 가진 분들이 이 平行宇宙라는 槪念을 使用하거나 結合해 自身들의 설, 世界觀을 表現하고 傳達함으로써 나름대로 널리 알려지게 된 模樣입니다. 애초에 이 平行宇宙라는 槪念은 最近에 갑自己 始作된 것이 아니라, 이미 存在했던 科學자들의 가설이나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의 影響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存在했던 그 가설이나 論文, 作品들 또한 그 移轉에 存在했던 것들로부터 影響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도대체 무엇이 그 源泉이었는가 하면, 印度 古代의 天啓經典인 베다를 비롯한 여러 經典들, 그리고 悟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聖者들의 가르침입니다. 이것들을 듣거나 읽은 科學자나 作家들, 그리고 이러한 分野에 關心을 가진 이들이 그 가르침을 充分히 理解하지 못하고 불充分한 理解에 머무른 狀態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만 그 가르침에 靈感을 받고 인스퍼레이션을 얻어, 科學자라면 自身의 理論을 展開하는 아이디어의 바탕으로 삼고, 作家라면 作品 구상의 아이디어로 活用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서 이미 眞理와 어긋나게 된 셈理智요. 只今 우리가 그러한 槪念들을 접할 때, 元來 그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무엇을 傳達하고자 했는지 그 圓形까지 파고들 必要가 있습니다.
世界의 實相과 創造, 그리고 '時間'의 政體
이는 世界의 實相과 創造에 관한 元來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ZeroNews의 다른 映像을 통해 이미 整理하여 방송하고 전해 드린 바 있습니다만, 世界가 한瞬間에 만들어至高 다음 瞬間에 全部 사라지며, 다시 다음 瞬間에 全部 創造되는 一連의 課程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으며, 게다가 그것을 自己 안의 無意識 領域에서 행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말씀드린 記憶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簡單히 짚어報告자 합니다. 一般的으로 우리가 意識할 수 있는 部分은 지극히 적으며, 아주 一部에 弗過하다는 事實을 記憶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意識하지 못한 部分에서는 도대체 무슨 一理 일어나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意識의 빛을 表面 부위에만 바라보는 것은 無名(無明) 狀態, 즉 一般的인 狀態입니다만, 그 意識의 빛을 넓히고 깊게 하기 위한 修行을 쌓아감으로써 보다 깊은 意識 次元에서 어떤 一理 펼쳐至高 있는지 보이기 始作합니다. 우리의 無意識 깊은 곳에는 엄청나게 뿌리 깊은 執着들이 無數히 潛在되어 있습니다. 이 潛在된 것들에 의해 문득 떠오르는 것이 바로 '印象'입니다. 이는 停止화면(스틸 이未知)의 形態로 솟아오릅니다. 달리 表現何者면, 自身의 無意識 次元에서 그 印象을 停止화면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修道 있습니다. 意識의 빛을 表面 부위에만 비추며 그것만이 存在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狀態에서는 얼핏 不可能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自身의 無意識 깊은 곳에서는 實際로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 世界의 모든 것, 宇宙의 끝에 이르기까지 온갖 存在와 색상, 配置, 그리고 그 性質 등 모든 것을 設定하고 있는 것은 無意識의 執着이며, 印象으로서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執着을 바탕으로 문득 떠오르는 印象, 스스로 만들어내는 停止화면의 世界인 셈이죠. 다만 이는 印象에 弗過한 것이기에 다음 瞬間에는 全部 痕跡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물거품 같고 꿈과 같은 것입니다. 빛의 點滅을 떠올려 布施면 理解하기 쉽습니다. 번쩍 켜졌다가 다음 瞬間에 全部 꺼져 버리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印象에 대한 執着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다음 瞬間에 또다시 번쩍 떠오르게 됩니다. 강하게 各人된 印象은 사라지더라도 反復해서 다시 솟아오릅니다. 다만 方今 사라진 印象과는 아주 微細하게 다른 要素가 더해지거나 빠져서, 약간 다른 停止화면으로서 다음 瞬間에 나타납니다. 다른 말로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理智요. 비록 그렇게 만들어진 印象이 意識 次元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 추악한 것, 혹은 悲慘한 事件一地라도 無意識의 領域에서 그것을 원했거나 무언가를 傳達하려 했기에 그처럼 스스로 創造하고, 이를 끝없이 되풀理解 온 것입니다. 表面的인 부위로만 보면 마치 플립북(파라파라 만화)처럼, 애니메이션처럼 동映像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한 變化와 움직임을 通常 '時間'이라는 槪念으로 믿고 살아可知만, 實際로는 時間과 空間을 가진 世界가 客觀的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無意識 속에 있는 執着에 따른 印象 停止화면의 連續에 弗過합니다. 이것이 바로 世界 創造의 實相입니다. 이는 널리 알려진 事例로 舊約聖經의 創世記(天地創造)에서도 象徵적으로 描寫되어 있으며, 釋迦모니 亦是 다른 表現으로 이 眞理를 설했습니다. 여러 聖者들과 古代의 多樣한 經典들이 서로 表現은 다를지라도, 이 世界의 實相과 眞理가 冒頭 '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完璧히 一致합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 보겠습니다. 이 모든 宇宙와 世界는 매 瞬間, 刹那마다 消滅하고 있으므로 實際로는 '그 瞬間'밖에 存在하지 않습니다. 只今 이야幾何는 모든 次元을 包含해 모든 世界와 宇宙가 그러합니다.
自身이 創造한 世界를 통째로 삼켜 안아주기 (救濟)
어쨌든 무언가 認知할 수 있는 것이라면 全部 그 瞬間에만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 瞬間에만 存在합니다. 認知할 수 있다는 것, 즉 어떤 次元의 몸을 통해서든 어떤 道具를 통해서든 무언가 認知하고 있다면, 그 世界는 매 瞬間 그 瞬間에만 存在합니다. 그 瞬間 以外의 世界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自身 안에서 印象으로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스스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 瞬間에 태어난 것조차 實際로는 印象에 弗過한 것이기에 實際로는 없다고 할 修道 있습니다. 앞도 뒤도 옆도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過去도 未來도, 平行하여 存在하는 世界도 없다는 뜻입니다. 굳이 表面 부위에만 意識의 焦點을 맞推古 있는 狀態에서 바라보아 굳이 말何者면, 過去와 未來와 平行 世界가 만약 存在한다면 그것은 오직 머릿속에만 存在할 뿐입니다. 實際로는 存在하지 않는다는 事實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釋迦모니도 같은 趣旨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 世界를 創造하는 創造神으로서 經典들에 象徵적으로 描寫된 것을 自己 自身이 無意識 次元에서 행하고 있다는 이 眞理,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意識의 表面的인 部分만 바라보며 그것만을 믿는 習慣에 길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執着은 너무나 뿌리가 깊어서, 비록 意識 次元에서 이 眞理를 듣고 '아, 그럴指導 모르겠네' 하고 首肯하거나 믿을 수 있을지언정, 潛在意識과 無意識을 包含한 全人格的인 次元에서 이를 完全히 受容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受容의 어려움에 대해, 요기이기도 했던 예수의 가르침 중에 다음과 같은 句節이 있습니다. '내가 平和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는 句節입니다. 飜譯에 따라 表現의 差異는 있겠지만 이러한 趣旨로 전해至高 있습니다. 이 말씀은 靈的으로 여러 解釈이 可能하겠지만, 여기서 引用何者면 다음과 같은 意味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意識의 빛을 表面 부위에만 비추며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一般的인 狀態의 사람들이 취하는 行動이나 말에 同調하는 것이 아니라, 眞理의 날카로운 검으로 그러한 것들을 베어내어 끊어버리기 危害 只今 여기에 存在한다는 뜻으로 理解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譬喩를 들어 이 眞理를 조금 더 理解하기 쉽게 說明해 보겠습니다. 가령 제가 저 먼 나라의 전혀 모르는 사람,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느 地域에 살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큰 어려움, 즉 '悲慘한 狀況'에 처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제가 媒體를 통해 보거나 듣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제가 創造해 낸 一理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제 責任이라는 말입니다. 꼭 '責任'이라는 單語를 쓰지 않더라도, 어쨌든 제가 만들었기에 그러한 地域이 存在하고, 그러한 사람이 있으며, 그러한 事件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情報를 傳達하는 手段 또한 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弗過하지만, 어쨌든 그 情報를 제가 受容하게 되는 것理智요. 이러한 맥락을 짚어보면 발밑이 쑥 꺼지는 듯한 衝擊을 받으실 修道 있겠지만, 一旦 便安하게 들어布施기 바랍니다. 只今 自身이 報告 있는 世界와 다른 것을 渴望하며 그쪽으로 도망치려 하는 것은 責任 回避라 할 수 있으며, 自身이 이 世界를 創造하고 있다는 眞理로부터 눈을 돌리는 行爲이자 報告도 못 본 척하는 방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自我의 價値 判斷과 平行宇宙의 陷穽
'내가 어떤 選擇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랬을 텐데'라든지, 自身에게 혹은 世界에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쪽으로—이 '바람직함' 亦是 自我의 잣대로 判斷한 것에 弗過하지만—어쨌든 自身과 世界에 더 좋다고 여겨지는 方向으로 옮겨가고 싶어 하는 열망과 그를 危害 에너지를 쏟는 마음의 이면에는 結局 '自我(에고)의 執着'이 道士리고 있습니다. 自我에 갇혀 있는 것理智요. 흔히 精神世界나 靈的인 가르침을 설하는 課程에서 平行宇宙나 次元의 移動 같은 槪念을 導入해 사람들을 이끌거나, 기묘한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修行法이나 워크숍을 가르치기도 합니다만, 그 속에서 누락된 致命的인 맹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러한 흐름에서는 于先 自身이 直面한 世界나 事件을 觀察하고는 그에 대해 價値 判斷을 내립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 '이것은 肯定的이고 저것은 否定的이다', '이것은 가볍고 저것은 무겁다', '이것은 내려놓는 편이 낫다' 등 온갖 시是非비를 가리고 判斷을 내리며, 陰謀론이나 世上의 背後에 숨겨진 眞實 따위를 쫓는 등 世上과 人間關係의 森羅萬象에 判斷을 내립니다. 그리고 自身이 더 便安해지거나 本人 基準에서 世界에 더 이롭다고 믿는 最適의 狀態를 想像하고 設定합니다. 그리고 그 本人에게 형편이 좋은 狀態로 나아가기 危害, 혹은 그에 周波數나 波動을 맞추기 危害 무언가 行動을 취합니다. 그러나 眞正으로 虛空의 문으로 향하고자 하는 이들이—實際 虛空은 오직 內面에만 存在합니다만—결코 看過해서는 안 될 엄중한 事實이 있습니다. 굳이 되풀이할 必要는 없겠지만 다시 한번 想起해 봅시다. 그 對象이 되는 人間關係, 世界, 宇宙의 여러 現象들에 대해 '바람직하다', '더 낫다', '안 좋다', '나쁘다', '내려놓아야 한다', '가볍다', '편하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며 是非를 가리고 選擇하며 渴望하고 있는 '그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 根源的인 물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나'를 알아차리고 質問을 던져야 합니다. 그 '나'는 참된 내가 아니라 自我에 弗過하며, 是非를 가리고 選擇하며 바라는 主體 亦是 結局 自我(에고)입니다. 들으시는 분에 따라 信念이나 理解하기 쉬운 觀點이 다를 것이기에 여러 表現을 섞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側面에서도 說明할 수 있습니다. 世界에 대해 그러한 是非判斷을 내린다는 것은 結局 신에게, 혹은 참나(眞我)에게 불평을 터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더 직설적으로 表現何者면 自身이 創造해 낸 世界와 事件에 대해 스스로 不滿을 제幾何는 꼴입니다. 世上의 모든 事物, 사람, 事件, 흐름 自體에는 本來 좋고 나쁨도, 아름답고 추함도, 悲慘함도 存在하지 않습니다. 現象 自體나 次元, 宇宙 自體에 어떤 價値 척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自我가 제멋대로 判斷을 내려 그렇게 바라報告 있을 뿐이며, 自身에게 유리한 쪽으로 도망치려 渴望하는 行爲는 結局 自我의 執着을 더 견고히 하여 自我에게 먹이를 주는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靈的인 길을 걷는 이들이 가장 注意해야 할 大目입니다. 自身에게 바람직하다고 判斷하여 그곳으로 옮겨가려 하는 마음의 움직임과 行動은 自我에 대한 執着을 基盤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自我를 自身이라 錯覺하고 행하는 모든 修行이나 워크숍은 그것이 설령 어떤 대단한 形態를 지녔을지라도 結局 自我의 먹이로 轉落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찌 眞正한 自我性찰의 態度라 할 수 있겠습니까?
참나에 대해, 혹은 신에 대해 그런 불평을 던지는 것이 靈的인 次元에서 眞情性 있는 態度라 할 수 있겠습니까? 信仰心은 어디로 가버린 것입니까? 眞正한 淨化와 치유, 참된 平和와 悟, 그리고 참나에 머무는 삶을 온 마음으로 眞知하게 追求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치유와 幸福, 靈的 解脫을 '바라지 않는 態度'가 核心이 됩니다. 즉, 解脫하고자 하는 조급한 열망을 내려놓는 一理 깊은 次元에서 必要합니다. 解脫은 解脫되기를 渴望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實現되는 것입니다. 解脫하지 못한 나라는 에고의 固着을 먼저 깨뜨려야 합니다.
自身이 創造한 世界를 통째로 삼켜 안아주기 (救濟)
自業自得(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亦是 本來 靈的인 意味를 품고 있었던 낱말입니다만, 自身이 無意識 次元에서 떠올려 만든 것은 어차피 自身뿐이기에 스스로 巨頭어들인다는 뜻입니다. 오직 그 일만이 매 瞬間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自身의 執着, 無意識 깊은 곳에 깊이 박힌 傾向성, 즉 自身의 業 全體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매 瞬間 無意識적으로 지어내어 經驗하는 이 世界 全體에 고스란히 投影되어 나타납니다. 自身의 執着이 지어낸 상(像)에 弗過합니다. 自身이 만든 상(像) 以外의 世界란 결코 存在하지 않습니다. 自身이 創造한 것 以外에는 아무것도 存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明確하게 말씀드립니다. 다른 世界나 다른 次元, 다른 可能性 같은 空想을 쫓을 것이 아니라, 只今 이 瞬間 마주한 그 世界를 어떻게 바라報告 受容하며, 그로부터 무엇을 發見하고 깨달을 것認可에 意識의 焦點을 맞추는 편이 훨씬 重要한 本質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虛空의 문 周邊에 모이신 분들께 確認 삼아 전해 드려야 할 더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世界를 그 自體로 實在한다고 믿고 바라보는 것 自體가 이미 '無名(無明)'이라는 錯覺 위에 세워진 現象입니다. 潛在意識과 無意識 속에 있는 수많은 執着보다 더 原初的인 根源的 誤解는 바로 이 無名이며, '自我를 自身이라 誤解하는 것'에서 始作됩니다. 이 分離된 自我가 홀로 存在한다고 錯覺함으로써 自己 以外의 다른 事物, 世界, 宇宙가 바깥에 實在한다는 잘못된 認識이 싹트게 됩니다. 自我와 혼연一切가 되어 버렸기에 自己 以外의 他人, 事物, 宇宙 등이 別個로 펼쳐져 있다고 確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原初的 無名입니다. 바깥의 現象에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또 다른 平行 世界를 渴望하며 아까운 에너지를 浪費할 것이 아니라, 오직 이 根源的인 물음으로 回歸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冷徹하게 짚어보자면, '내가 只今까지 選擇해 왔고, 只今도 選擇하고 있으며, 選擇할 수 있다'는 생각 亦是 自我의 傲慢이자 錯覺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想念, 選擇, 行動은 애초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것을 하고 있으며 그 主體는 누求人가 하면, 바로 自我(에고)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次元의 世界이든 選擇을 가하는 主體는 결코 참나가 아닙니다. 自我에 대한 執着이 너무나도 뿌리 깊기 때문에 '自身의 생각과 行爲는 本人이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 眞理를 全人格的으로 받아들이기는, 앞서 말씀드린 世界 創造의 眞理를 믿는 것보다 훨씬 험난한 課程일 것입니다. 自我의 족쇄가 너무나 强力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自身이라 믿는 그 '나'는 實相 想念의 파편들이 뭉쳐진 假想의 執着물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곳에 꽁꽁 묶여 있기에, 바깥에 對象化된 世界가 따로 存在한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時間과 空間의 錯覺 속을 헤매는 것입니다. 意識의 빛을 表面 부위에만 비출 수밖에 없어 그 좁은 監獄에 갇혀 있을 때는 當然히 바깥 世界가 獨立하여 흘러가며 時間과 空間의 變化에 一喜一憂하고, 本人에게 더 安樂한 世上을 동경하며 헛된 에너지를 허비하는 것도 無理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法問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이 眞正한 淨化와 平和, 고요, 神醫 나라로의 回歸, 悟과 解脫, 참나에 머무는 삶을 온 마음으로 眞知하게 追求한다면, 그리고 '나'와 '他人·世界'가 分離되어 있다는 그 錯覺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면, 그 自我로서 經驗하는 自身과 世界 全體를 '통째로 삼켜 안아主語야(受容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存在를 元來의 源泉(眞我)으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온 世上은 여러분이 지어낸 상(像)이기에, 그것들을 眞正으로 치유하고 解放시키며 救濟할 수 있는 救援자는 오직 스스로뿐입니다. 여러분이 創造한 世界는 오직 여러분 自身만이 救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가슴속 깊이 各人해야 할 眞實은, 이 스크린 위에 存在하는 唯一한 九歲주이자 彌勒菩薩은 바로 當身이라는 事實입니다. 오직 當身뿐입니다.
積極的인 체념과 感謝, 그리고 하나의 實在
만약 매 瞬間 끊임없이 새롭게 마주하는 只今의 世界와 自身에 대해 무언가 不滿을 토로하고, 感謝함으로 受容하지 못한다면, 설령 本人이 머릿속으로 渴望하던 完璧한 世上을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또다시 그 속에서 不滿을 찾아내는 習慣을 反復하게 될 것입니다. 보다 窮極的인 眞理에 依據해 말씀드리자면, 世界와 自身을 觀照하는 나, 그에 대해 是非를 가리는 나, 選擇을 가하는 나, 무언가를 내려놓으려는 나, 내려놓은 뒤의 나 등은 冒頭 自我의 幻想일 뿐 결코 참나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스로 참나에 到達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自我의 쳇바퀴만을 굴리게 됩니다. 어떤 對象을 凝視하는 나, 다른 平行 世界를 넘보는 나, 修行 전후의 나, 내려놓기 전후의 나는 全部 에고이며 本來의 自我가 아닙니다. 現象이 설령 어떻게 변할지라도, 그것에 滿足하든 不滿족하든 참다운 平和(虛空의 문)에는 단 한 걸음도 가까워지지 못합니다. 人間이 도대체 어디까지 겸손해져야 하는가, 그 眞正한 겸손의 意味를 오늘날 온갖 넘쳐나는 情報 속에서 다시 한번 깊이 熟考해야 할 때입니다. 흔히 기도 文句로 쓰이는 '뜻대로 하소서'나 '아멘' 같은 告白들의 깊이는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오합니다. 뿌리 깊은 업과 執着, 無名이 쉼 없이 回轉시키는 이 세파 속에서 中心을 잡고 참나와 하나 되어 머무르기 危害서는 형언할 수 없는 겸손함(내려놓음)이 要求됩니다. 宇宙 森羅萬象과 굳이 하나가 되려고 애쓰는 '나'가 必要한 것이 아니라, 本來부터 森羅萬象과 하나인 '나'가 이미 存在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직 그 本來의 나만이 存在합니다. 그러므로 分離된 自我로서는 그저 가슴 깊은 感謝함으로 現象을 받아들이는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전적인 受容과 내맡김 속에 眞正한 淨化와 치유, 平和와 悟, 그리고 神醫 나라가 存在합니다. 부디 이 原理를 모든 修行과 믿음의 確固한 초석으로 삼아 나아가時期를 바랍니다. 그러면 虛空의 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