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般課程 - 22 講 -

陀 스님

第 1 講 첫만남

여러分 반갑습니다.

講義에 들어가기 前에 順序를 定합시다.

첫 時間은 첫 만남입니다. 그 다음이 主題 講義입니다. 主題 講義는 2 部로 나누려고 합니다. 修心으로 들어가면 煩惱構造부터 解해야 합니다. 煩惱構造를 解하면 自然히 이어서 修心體系 가 나오고 幸福論으로 收斂하게 됩니다. 修心 의 具體的인 學習으로 頓忘 暝想, 知足 暝想, 非我 暝想, 나지사 暝想, 죽음 暝想이 한 講義로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이 和合장, 그리고 交流 四德, 作善, 行動 暝想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一般課程 修練은 거의 包含되고 맑은 물 붓기와 整理 말씀으로18 講이 됩니다.

그리고 18 講 以外에 아주重要한 것은 同事攝 로고에 對한 解입니다. 그래서 同事攝로고에 對해 한 講座를 하고 그 다음에 그 로고에 相應해서 人生 三重奏로 한 講座를 하겠습니다. 人生 三拍子도 人生살이에서 대단히 重要하므로 人生 三拍子도 한 講座 하겠습니다. 同事攝 工夫에서 觸受 構造는 대단히 重要한 主題입니다. 觸受 構造에 對한 解는 그 사람이 人生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左右하기 때문에 觸受 構造도 한 講座로 하려고 합니다.

여러分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祝賀의 말씀을 드립니다.

同事攝 工夫 體系에는 人生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對한 答이 들어 있습니다. 人生을 왜 사느냐? 人生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것은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必要한 質問입니다. 그 質問에 對한 答은 이 世上에 아주 많고 많습니다. 여러分들도 經驗해 보셨겠지만 어느 책, 어느 講義가 人生에 對한 答 을 同事攝만큼 體系를 딱 잡아서 보여 주었던가 돌아보십시오.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分들이 스스로 그 問題를 解決하려고 하면 너무도 어렵습니다. 나 같은 境遇에는 그것 하나에 한 生을 걸었습니다. 人生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暝想하고 思索하고 整理 하고 實習해보고 하는데 한 生을 걸었어요. 多幸 히 哲學을 했기 때문에 그나마 그것에 對한 答 을 잘 엮어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同事攝을 客觀的인 次元에서 바라보면 感動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意味로 여러分들께 祝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分들이 同事攝이 提示하는 삶의 哲學 體系 를 제대로 알기 爲해서 이런 復習의 場을 거듭 갖는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여러分들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은 거울님을 봐주기 爲해서입니다. 내가 저 카메라 앞에서 혼자 떠들어대면 좀 異狀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分 이 앞에 앉아 계시니까 머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分들은 거울님에게 扶助를 하는 게 틀림없고 또 여러分들은 거듭 同事攝 工夫를 復習할 수 있으니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復習을 여러 番 하게 된 여러分에게 感謝 次元 을 넘어서 祝賀 드린다는 것입니다.

첫 만남입니다. 첫 만남 이라고 하면 여러分들은 무슨 생각이 들어요?

열 달 동안 受苦하고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어머니하고 딱 만나는 것. 그것이 첫 만남입니다. 태어난 아이는 무엇이라 하며 태어나겠어요? 어머님, 受苦하셨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열 달 동안 저를 爲해 受苦 해주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얼굴 처음 뵙네요. 이렇게 첫 만남이 始作될 겁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첫 만남의 場이 많아요. 갓 태어났을 때도 첫 만남이고大門 열고 나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만나야 좋은가 하는 것은 人生에 있어서 重大한 主題가 됩니다. 特히 修練場에는 서로 모르는 얼굴들이 모여 앉게 됩니다. 修練의 場을 열어 가야 되겠는데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rapport 形成이 안 된 狀態로 始作 하면 그 서먹서먹한 情緖가 다음 講義로 이어지게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을 解消시키기 爲해서 첫 만남이라고 하는 장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修練에나 첫 만남의 場이 있습니다. 그런데 同事攝에서는 첫 만남의 場을 바로 實習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講義까지 하고 들어가는 式으로 되어있습니다. 그 講義가 只今 時間입니다.

자, 이 자리에는 앞으로 同事攝 修練을 이끌어갈 分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면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해서 今方 rapport 形成을 잘 시켜줄 수 있을까요? 答은 簡單합니다. 첫 만남 자리에서는 武裝 解除가 第一重要합니다. 緊張 解除입니다. 指導 者들은 緊張 解除를 爲해서 애써야 합니다. 내가 어느 修練會를 갔더니 첫 時間에 두 사람 사이에 베개를 하나씩 주고 베개 뺐기를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나 自身도 修練會 主管者인지라 그것이 印象的이었습니다 아. 이런 式으로 풀어가는구나, 했지요.

그런데 同事攝은 恒常 價値觀이 先行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첫 만남에서도 생각거리를 많이 提供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 分들이 첫 만남의 場을 열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첫 만남의 場을 열어주는 立場도 되지만 여러分들 自身에게도 처음 만난 사람과 關係를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 더 優先的인 主題가 될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여러分들이 몇 가지를 念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于先 緊張問題입니다. 第一 큰 素材가 緊張을 어떻게 풀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事實은 그것이 全部입니다. 緊張이라는 單語를 떠올려 보세요. 緊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의 對象을 만났을 때 괜히 그 사이에 흐르는 不便한 情緖的 흐름입니다. 그런데 安全地帶인데 내가 緊張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런 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 바람직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요? 바로 《安全地帶에서 緊張하는 것은 그 緊張 程度만큼 未成熟하다》는 것입니다. 이 寸鐵 을 마치 佛經이나 聖經의 어느 句節처럼 머리에 담아 두세요. 安全地帶에서 緊張하는 것은 그 緊張 程度만큼 未成熟하다는 생각을 딱 하게 되면 自然히 “아, 내가 只今 이 만큼 緊張하고 있구나. 이 程度 로 未成熟하구나.” 하면서 精神차리고 深呼吸 부터 하게 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할 겁니다. 이 寸鐵은 여러分들의 緊張 解除를 하는데 相當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寸鐵도 좋습니다. 《옷깃 한番 스치는 因緣이 5 百生 因緣이다.》 이것은 佛敎 쪽의 말인데 이런 말도 緊張 解除를 하는 데에 좋을 것입니다. 내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살짝 緊張하고 있는데 바로 이 분이 前生 前生 前生. 어느 타임에 내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다. 내 딸이었고 내 아들이었고 내 가까운 親舊 였다. 이런 뜻입니다. 實際로 여러 分들이 서로 서로 옆에 앉아 있는 程度라고 하면 5 百生까지 갈 必要 없이 바로 前生 程度 에 全部가 兄第 자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只今 내 옆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全部 내 父母, 내 兄第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 내 父母, 다 내 兄第였다》 한다면 바로 《다 내 父母요, 내 兄第이다》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寸鐵은 《本來 宇宙는 하나다》 하는 말입니다. 宇宙는 本來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여러 分들이 깨달았다면 한 몸을 한 몸이라고 首肯하게 됩니다. 宇宙는 本來 한 몸이라고 알려면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조금 어려울지는 모르나 于先 믿음으로 받아들여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瞬間에 깨달음이 다가왔을 때 내가 속으로만 생각하고 읊조리던 것이 이제 나의 실제가 되었구나, 이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러한 信念들을 가지고 여러 分들이 그 만남의 場에 접근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그 信念이 여러 分들을 크게 도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좋은 寸鐵이 있습니다. 적응력이 解脫이다 하는 寸鐵입니다. 적응력이 解脫이다. 解脫이 무엇입니까? 내가 경계에 접했을 때 執着하지 않는 것이 解脫입니다. 내 가 경계를 對했을 때 緊張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어떤 執着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내가 對象에 걸릴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對象에게 잘 적응된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여러 分들이 緊張한 程度만큼 未成熟 하다는 말은 緊張한 程度만큼 불 解脫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경계 적응이 술술 잘 되는 것, 걸림 없이 잘 되는 것. 이것이 解脫입니다. 여러分들이 모든 境遇에 스스로를 잘 보세요. 사람을 對하거나 일을 對하거나 사물을 對했을 때 내 마음에서 걸림 없이 쑥쑥 통해지는가 보세요. 통해지는 그 心理 狀態를 解脫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式으로 여러分들이 접근해가게 되면 훌륭한 첫만남이 되겠지요.

모임에는 반가움이 있어야 합니다. 만났으니까 반가워야 합니다. 우리 초면이지요? 하 는 狀況이 아니고 조금 더 밀고 들어가면 어때요?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는 狀況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지요. 어머니, 아버지까지는 아니라 해도 조금 어쩌다 보면 나중에는 반가운 자리가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 分 들은 여러分들이 모인 자리를 서로서로 만나지는 자리로 만들어라 하는 겁니다. 그러기 爲해서는 누가 만들어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가 반가운 자리가 되도록 하라는 거예요. 모임 일 박자를 반가움이라고 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전에는 반가움 槪念은 쓰지 않고 이박자와 三拍子 두 개로만 썼어요. 유익하고 즐거워라. 유익한 자리를 만들고 즐거운 자리를 만들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훗날 반가움이라는 槪念이 重大한 槪念인데 내가 빠뜨리고 있었구나 해서 반가움을 넣어서 모임 이박자를 三拍子 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모임에는 반드시 그 目的이 있을 거예요. 目的을 다루어가는 過程에 그 모임은 유익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모임을 유익한 자리가 되도록 하라는 거예요. 누가? 나부터 내가 이 자리를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자리가 되게 하리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익한 자리라고만 하면 너무 빡빡하고 심각하고 너무 진지하고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흥이 나는 즐거운 자리가 되게 하라는 거예요. 즐겁고 유익하고 반가운 자리가 됐다고 하면 그 자리는 성공한 자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여러分들이 첫 만남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주로 무엇을 합니까? 빙 둘러앉아서 주로 무엇을 해요? 우리 모두 場에 들어가기 前에 簡單히 自己 紹介라도 합시다. 보통 그렇게 하지요. 그 自己紹介라고 하는 것이 첫 째 가는 단골 메뉴입니다. 첫 만남 프로그램으로 自己紹介를 하는 것은 그냥 基本 메뉴입니다. 그래서 自己紹介가 괜찮아요. 인류가 개발한 작품으로 모였다 하면 自己紹介를 하게 됐다는 것은 하나의 쾌거입니다. 왜? 만나면 그 사람에 對해서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인사하고 그 다음에 自己紹介하고 그럴 것입니다. 첫 만남 프로그램으로 인사하기, 그 다음엔 自己紹介하기, 그 程度면 좋습니다.

自己紹介는 뭐예요? 나에 對한 정보를 提供해주는 것입니다. 뭐, 내 나이는 칠십이 넘었습니다. 뭐 이런 것 까지는 안 해도 되겠지만 아무튼 무엇이든 이 자리에서 말하면 괜찮겠다고 여겨지는 건 다 보여줍니다. “내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요? 내 고향은 전라남도입니다. ” 이런 程度는 自己紹介를 할 때 좋습니다. “여러分들도 보시다시피 나는 중이잖아요. 몇 년이나 중 짓을 했을까. 내가 只今 계산해보니깐 47년 했습니다. 내 은사 스님이 알고 싶으십니까? 이 시대에 생불이라는 말을 들으셨던 淸자 華자 큰스님이 제 스僧입니다. ” 이런 式으로 自己紹介를 합니다. 인사를 한 다음에 自己紹介 를 적절하게 하는 거예요. 또 相對方이 인사를 하고 自己紹介 를 하면 나는 傾聽을 잘 하고 고개도 끄덕끄덕 하면서 그러십니까? 그렇게 해주면서 서로 交流하는 장에서 한 마당 程度 지냈다고 하면 어찌 되겠어요? 緊張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緊張이 확 풀리죠. 그러면 손에 손을 잡고 오손도손한 분위기가 된 狀態에서 본격的인 修練場으로 들어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장이 큰 장이든 작은 장이든 여러 사람이 모였다 하면 그 첫 만남에서 해야 할 일거리들이 좀 있다는 거예요.

내성的인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눈빛을 회피하고 인사는 안하고 괜히 緊張해서 얼굴을 보려고 하면 피하고 하는 그런 境遇가 있습니다. 相對方을 심하게 빤히 쳐다보는 것도 問題지만 심하게 피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적당히 相對方을 건너다보고 적당히 피하면서 그 사이에 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關係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修練場에서는 당연하지만은 修練場과는 상관없이 여러分들의 人生에는 첫 만남의 자리들이 수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 첫 만남의 瞬間이 알고 보니 제법 일거리가 있는 瞬間이로구나 하게 됩니까? 오늘 이 첫 만남 講義로 여러分의 人生에서 첫 만남의 場 이 보다 아롱진 狀況으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